생활정보 / / 2020. 8. 12. 07:39

쾌락주의 삶의 단상

쾌락주의는 모든 기쁨의 행위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기쁨의 증가와 고통을 정확하게 줄여 최대의 기쁨을 계산하는 윤리적 이론이다. 쾌락주의에 따르면 쾌락만이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은 이러한 쾌락을 바탕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쾌락주의는 고대의 비문에 의해 현대 벤담과 밀에 의해 사회 전체의 쾌락을 강조하는 쾌락주의 공리주의로 체계화되었고, 개인의 쾌락을 강조하는 이기적인 쾌락주의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쾌락주의자들은 결국 단기적인 말초적 쾌락을 겪는 것으로 오해받고 있다. 그러나 순간적인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과 쾌락주의적인 삶을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쾌락주의는 일시적인 쾌락 극대화가 아닌 장기적인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단기적이고 말초적인 쾌락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회적 성취가 장기적으로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면, 쾌락주의자들은 단기적인 즐거움보다는 사회적 성취를 먼저 추구한다. 즐거움은 즐거움을 제외한 모든 것에 쓸모없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지만 쾌락만으로는 가치가 없다고 본다. 세상은 쾌락, 심지어 고통 이외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발이 불의 구멍으로 떨어져 통증을 느끼고 발을 당기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통증이 느껴지지 않으면, 발을 불의 구멍에서 빼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통증이 분명 좋을 것이다. 물론 고통은 도구적 의미에서 가치가 있으며, 그 자체로 목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쾌락주의는 도구 도구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 추구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도구다. 고행자들이 기꺼이 견뎌내는 고통도 종교적 도덕적 성취와 만족을 추구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고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대부분의 세속적인 금욕주의자들은 재화나 명예와 같은 사회적 업적을 위해 즉시 기쁨을 포기하고, 종교적 금욕주의자들은 사회적 성취와 내적 성취 모두에서 빛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사후 성취에 대한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한다. 쾌락주의가 여러 가지 오해로 부당하게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쾌락주의는 어떤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쾌락의 정의나 쾌락의 계산 등 쾌락의 근원이 다양하고 다른 쾌락의 근원을 같이 볼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식욕의 충만에서 시작된 기쁨과 사회적 명예의 획득에서 시작된 것과 같은 기쁨인가? 벤담은 비 쾌락주의자들로부터 저급 돼지의 즐거움과 고차원적인 인간의 쾌락을 동일시하고, 궁극적으로는 돼지와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돼지 철학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비록 이 쾌락이 질적으로 같고 양적으로 다르다고 대답하면서 지속해서 쾌락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밀은 불만을 품은 인간이 만족스러운 돼지보다 우월하고 불만을 품은 소크라테스가 만족스러운 바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기쁨의 질적 차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차지할 때, 여러분은 이질적인 쾌락을 서로 비교하는 방법을 계산하는 데 문제가 있다. 밀은 저급한 쾌락과 고품질의 쾌락을 구별했으며, 양면을 고품질의 쾌락으로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쾌락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고 위엄 있는 삶을 추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자유와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는 고품질의 쾌락은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후기의 다른 쾌락주의자들은 밀이 쾌락주의의 입장을 암기했다는 비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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